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문단 편집) == 기타 == * 여담으로 2차 대전 종전 후 5년 뒤에 발발한 [[6.25 전쟁]]에서 [[중국 인민지원군|중공군]] 참전으로 인하여 국군과 유엔군에게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더글러스 맥아더|맥아더 장군]]은 [[중국]]을 상대로 핵공격을 할지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다. 하지만 [[해리 S. 트루먼]]을 비롯한 미국 정치계는 2차 대전 직후인 상황인지라 [[제3차 세계 대전|3차 대전]]에 대한 우려가 커서 중국과의 확전을 피하고 싶었고, "유럽에선 절대 안 써 놓고, 아시아 상대로 또 쓰는 건 인종적이다"라는 여론이 [[제3세계]] 국가들에 있었고, [[냉전]]으로 적국을 최소화해야 했던 미국은 핵 사용 결정은 보류하다가 폐기하였다. * 히로시마 원폭 투하 상황에 대해 자세히 다룬 책으로 <카운트다운 히로시마>가 있다. 방대한 자료 조사와 중립적인 시각으로 원폭 투하 준비 과정(순양함 [[인디애나폴리스 침몰사건]]의 비극도 나온다)부터 생존자들의 이야기까지 폭넓게 다루고 있다. 이 책의 내용을 바탕으로 만든 같은 제목의 [[BBC]] 다큐멘터리도 있다. 다만 '일본 민간인도 피해자가 맞을지라도 마치 그걸 이용해서 일본이 피해자인 양 묘사했다'고 주장하면서 역시 불쾌하게 보는 사람들도 많으니 판단은 알아서 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일본, 미국 외 제3자의 입장에서 만들었다는 점도 감안할 필요는 있다. * 인터넷에서 [[식민지 근대화론]]이 나오면 카운터로 원폭수혜자라고 하기도 한다. * [[종이학]]이 반전과 반핵의 상징이 된 것도 원폭 투하와 관련이 있다. 히로시마에서 살던 [[사사키 사다코]]라는 소녀가 원폭투하 이후 방사능에 노출되어 시한부 판정을 받았고, 병의 완쾌를 기원하면서 종이학을 접었다. 비록 사다코는 종이학을 다 접지 못하고 숨졌지만, 이 일이 계기가 되어 종이학은 반전과 반핵의 상징이 되었다. *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을 2번 맞은 사람도 있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은 156명이고, 그 중 일본 정부가 인정한 사람은 [[야마구치 쓰토무]] 1명이다. 그는 미쓰비시 소속의 선박 설계 기사로 히로시마에 출장을 갔다가 하숙집 노부부와 수다를 떠는 등 느적거리다가 원폭을 맞았는데, 제 시간에 도착했다면 폭심지 근처라서 사망했을 것이라고 한다. 폭발이 일어난 것을 봤을 때 방공 훈련 내용대로 바닥에 바짝 엎드렸지만, 후폭풍에 몸이 수십 미터 가량 날아가 도로 옆 [[감자]]밭에 떨어져 한동안 기절해있었다고 한다. 그는 한쪽 팔과 상반신에 화상을 입고 고막에 손상을 입은 채 지옥도가 된 히로시마에서 하루를 보내고, 가까스로 히로시마에서 빠져나가는 열차에 타 고향인 나가사키로 돌아왔다. 심한 화상으로 몸에 붕대를 칭칭 감은 상황에 [[미쓰비시 그룹|미쓰비시]]에선 회사로 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보고하라고 명령했고, 그는 나가사키 사무소에 출근해 자신의 상태를 보여주며 동료와 상사에게 원폭의 위력을 설명했다. 그리고 상사가 "단 한 발의 폭탄이 도시 전체를 파괴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라는 의견을 내놓는 와중 원폭을 맞았다. 운 좋게도 가족들은 폭격을 피해 방공호로 가서 살아남았지만, 쓰토무 본인은 2번의 연달은 피폭으로 몇 년 동안 죽을 고생을 했었다. 쓰토무는 건강을 회복했고, 이후 교사로 생활하다가 2010년에 9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 2005년에 [[일본]] [[히로시마]] 방송국에서 해롤드 애그뉴[* 원폭 개발자 중 한 명이며 당시 애놀라 게이의 파일럿 중 한 명이자 히로시마 버섯구름 사진을 직접 찍은 인물이다.] 박사를 대담 형식으로 초빙하였는데 그 내용이 총체적인 난국이다. 요약하면 원폭을 겪은 히로시마 출신 2명(남녀 각 한 명)이 해롤드에게 [[사죄]]하도록 종용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ufZym-LkkBw&feature=emb_title|요약본(한글 자막)]], [[https://www.youtube.com/watch?v=SdDxlMAvrwI|풀영상(한글 자막)]], [[https://www.youtube.com/watch?v=ledy5yECAJs|일본 TBS 원본 영상]]. 정확히는 해롤드 박사에게 원폭 투하 후 "버섯구름 아래에서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을 보고 어떤 마음이 들었느냐"며 책임을 따져 묻는 뉘앙스였지만, 박사는 '''"못 봤고 [[도쿄 대공습]]과 비슷할 것"'''이고 '''"비난하고 싶으면 [[진주만 공습|그런 짓]]을 한 [[일본군]]을 비난해야죠, 저는 사과하지 않습니다. 저에게는 진주만 공습이 결정적이었어요. 저는 너무나 많은 친구들을 잃었습니다"'''라고 강하게 반박했다. 애그뉴 박사의 사과를 바란다고 여러번 말한 남성에게는 "저는 사과하지 않습니다. 사과해야 하는 사람은 당신이죠. 이런 말이 있습니다. 진주만을 기억하라"라고 대답했다. 해롤드 박사의 이 같은 대답에 대해서 당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한 개그맨 [[마츠모토 히토시]]가 박사에 대한 비판을 했었다. [[https://www.fmkorea.com/3044570124|링크]]. 마츠모토는 히로시마에만 원폭 투하했으면 됐지 왜 나가사키에도 떨어뜨렸냐고 비판했지만, 이 역시 무지의 소산이다. 상술했듯 나가사키를 구할 기회는 있었으나 일제는 여전히 항복을 거부하며 미국이 2번째 폭탄을 쓸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초래했다.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된 이후에도 일제가 항복을 거부하였기에 미국도 일본의 전쟁 수행 의지를 꺾는데 원폭 하나로는 부족하다고 판단할 수 밖에 없었다. * 2018년 [[방탄소년단]]의 [[지민]]이 원폭 투하 셔츠를 입었던 것으로 인해 논란이 일어났을 때 소속사인 [[빅히트 뮤직|빅히트]] 측에서는 11월 13일 공식 페이스북에 "원폭 투하로 피해를 입으신 분들께 상처를 드릴 의도가 전혀 없었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임을 분명히 밝힌다."라며 상세한 입장을 담은 공식 입장문을 발표했다.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1811132277019672|#]] "일본과 한국의 원폭 피해자협회 관계자들과 접촉해 현재 제기되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 설명하고, 상처 받은 이들에 사과를 하고 있다."라고도 했다. 해당 셔츠를 입었던 멤버 [[지민]]은 이 날 도쿄 돔 첫날 공연에서 마지막에 [[일본어]]로 "우리들은 2014 년 처음 일본에 와서 시부야의 작은 장소에서 라이브를 하고 드디어 도쿄돔에 올 수 있었습니다. 일본과 세계에 염려[* 당시 원폭뿐 아니라 일본 극우 측에서 맞불 식으로 꺼내든 나치 관련 논란도 있어 이것도 소속사 측이 입장을 발표했다.]를 끼친 것 같다. 정말 마음이 아프다."고 얘기했다. [[https://randomviews.net/archives/1557/|#]] 일본 TBS는 이것을 "정말 미안해요. 일본 여러분"이라고 지민이 마치 [[일본]]에 대해 사과한 것처럼 날조하였으나 거짓임이 드러나자 TBS는 사과하고 정정보도를 하였다. [[https://www.sedaily.com/NewsVIew/1S7C7LUBNB|#]] 빅히트와 [[방탄소년단]] 측은 어디까지나 양국의 원자폭탄 피해자들에 대해 사과를 한 것이지 일본 정부나 일본 극우들에게 사과한 것이 아니다. 11월 16일에는 빅히트 측에서 경남 합천의 한국원폭피해자협회 관계자들을 만나 의도치 않은 논란에 대해 사과했다. 한국원폭피해자협회 측도 사과를 받아들이고, 오히려 일본이 이 셔츠를 문제 삼아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는 것을 지적하며 일본의 반성을 촉구했다.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8/11/16/2018111602876.html|#]] * 한국에선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토네이도]]의 강도를 분류한 '후지타 스케일'의 아버지인 일본계 미국인 기상학자 테드 후지타(Ted Fujita)가[* 후에 미국으로 귀화했지만 당시에는 일본인이었다. 한국이야 토네이도가 없다시피 해서 잘 부각되지 않지만, 대기과학 분야에서 [[토네이도]] 및 뇌우로 인한 돌풍 연구의 대부로 알려져 있다.] 하필 나가사키 원폭 당시 고쿠라에 있었다. 2번의 원폭에서 고쿠라가 대체 목표 및 주요 타겟으로 지정되었던 걸 생각하면 정말 천운이었던 셈. 후에 후지타는 원폭 피해 현장 조사에 투입되었고, 이는 그가 본격적으로 뇌우에서 발생하는 다운버스트 및 토네이도 연구에 첫 발을 내딛는 중대한 기로가 된다. 때문에 정말 미군이 그 때 원래대로 고쿠라에 원폭을 떨어트렸다면 대기과학 연구가 현재보다 더 뒤쳐졌을 것이라는 말도 있다. * 2021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투하 76주기에 주일본 [[독일]] 대사관 공식 트위터([[https://twitter.com/germanyinjapan|#]])에서 각각 희생자를 추모하는 트위터를 올렸는데, 8월 9일 나가사키 원폭 투하일에 올린 2번째 트윗에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는 핵 전쟁의 광기를 말해주는 상징적인 존재입니다. 발단은 독일과 일본의 민족주의와 군국주의로 인해 시작된 전쟁입니다.''''라는 문장을 추가하였다. [[https://twitter.com/germanyinjapan|대사관 트위터]], [[http://news.naver.com/main/read.naver?mode=LSD&mid=sec&sid1=001&oid=023&aid=0003632560|기사]]. 이에 [[넷 우익]]들이 미친 듯이 반발하는 트윗을 보냈으나 일부 공감한다는 트윗도 간혹 있었으며, 첫번째 트윗에 비해 엄청난 리트윗 수를 보여줬다. * [[12월 7일]]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에서 다루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